용암이 만든 하천 습지, 진수내
제주시 구좌읍 송당리 2808번지. 천미천 지류 중간에 넓은 소(沼)인 진수내가 있다. |
글, 사진 / 습지블로그 서포터즈 양정인
제주 습지의 특색과 다양성은 ‘화산섬’이라는 데에서 기인한다. 제주에는 강이 없지만 용암이 흐르며 길을 낸 하천이 143개나 있다. 한라산에서부터 바다를 향해 방사형으로 뻗은 이 하천들은 평소에는 대부분 물이 흐르지 않는 마른 천(川)이었다가 비가 내리면 용틀임을 하며 빗물이 바다로 빠져나가는 길이 된다. 이러한 건천(乾川)을 제주 사람들은 ‘내창’이라고 불렀다.
어린 시절 큰 비가 오고 난 뒤 동네마다 하나쯤 있는 내창에 물이 불어 굉음을 내며 쏟아지는 장관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격류는 금세 바다로 빠져나간다. 그러고 나면 내창은 아이들이 헤엄치며 물놀이 하는 곳으로 변신하기도 했다. 평소에 물이 없을 땐 유채꽃 흐드러진 내창 물웅덩이에서 개구리알을 찾으며 놀기도 했다.
진수내에 비친 나무들의 반영. 진수내 기슭은 두터운 진흙층이 이루어져 있어 사스레피, 동백나무, 가시나무, 구실잣밤 나무 등 온대성 상록수가 숲을 이루고 있다. |
제주의 하천 곳곳에는 용암이 굳으면서 만들어낸 기암괴석과 그 사이사이에 소(沼)가 산재해 있다. 하천 기슭마다 울창한 숲이 우거져 있고, 물이 고인 소(沼)에는 양서파충류, 어류, 수서곤충뿐 아니라 그들을 먹이로 삼는 수많은 조류와 포유류가 드나들며 생태계의 오아시스 역할을 한다. 특히 긴꼬리딱새, 팔색조, 두견이, 원앙 등 멸종위기 철새를 비롯해 다양한 야생동물의 이동통로와 보금자리 역할을 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 중에서도 천미천은 제주에서 가장 길고도 변화무쌍한 지류를 가지고 있으며 다른 하천들 보다 더 다양하고 풍부한 습지를 품고 있다. 천미천은 한라산 해발 1100m 동측사면 부근에서 발원해 제주시 동남부와 서귀포시 경계를 구불구불 넘나들다가 서귀포시 표선면 하천리에서 바다와 만난다.
진수내 주변은 빽빽한 삼나무 숲이 들어서있고 때죽나무 같은 낙엽수도 고루 어우러져 있다. |
제주시 구좌읍 송당리와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를 지나는 천미천 중류 부근에는 곳곳에 작은 물웅덩이와 소(沼)가 있다. 그 중심에 위치한 진수내는 제주에서도 보기 드물게 넓은 소(沼)로, 풍부한 수량으로 사계절 물이 마르지 않아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한다.
진수내(진숫내)라는 이름은 길다는 뜻을 가진 제주어 ‘질다’에서 온 말 ‘진’과 수(水), 내(川)가 합쳐져 ‘긴 하천’이라는 의미이다. 하천이 흐르는 어귀에 커다란 자배낭(구실잣밤나무)이 있어서 지역에 따라 ‘자배남수’로 부르기도 했다.
늦가을 아침 진수내를 찾았을 때, 사람 없는 습지에는 겨울철새들이 주인이 되어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바스락 낙엽 밟는 소리도 조심스러운 찰라, 그 작은 기척에도 새들은 물결에 파문을 남기고 날아가 버렸다. 하천 주변 바위는 전날 내린 비로 물기를 머금어 모락모락 수증기를 뿜어내어 신비한 느낌을 자아내고 울퉁불퉁한 돌구멍 마다 맑은 물이 고여 있었다.
오래 전 송당에 있는 국립목장에 물을 대기 위해 설치했던 댐의 흔적이 남아있다. |
진수내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시멘트 둑이 보인다. 이 둑은 이승만 정권 때 정부가 국립목장을 지을 계획으로 지금의 송당목장 터에 목장을 짓고 축사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쌓았던 댐이었다고 한다. 오래되어 부식되어가는 시멘트 둑은 수려한 진수내 풍경에 옥에 티처럼 이질적으로 다가온다.
진수내 곳곳은 넓은 화산 암반인 빌레 지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
진수내 곳곳은 평평하고 넓게 퍼진 화산 암반과 울퉁불퉁 구멍이 페인 현무암 화산석이 혼재되어있다. 점도가 약한 파호이호이 용암이 만든 빌레 지형이 완만하게 퍼져있고 하천 기슭에는 진흙층이 두텁게 쌓여있어 그 위로 삼나무, 동백나무, 사스레피, 가시나무, 구실잣밤나무 등 난대성 상록수들이 우거져있다. 진수내 주변 산책로에는 때죽나무 같은 낙엽수도 많아서 바닥에는 때죽나무 열매가 자갈처럼 깔려있었다.
진수내는 지도에 지명조차 표기되지 않은 장소이지만 우거진 숲이 맑은 물에 반영되는 모습이 아름다워 숨은 비경으로 소문 난 명소가 되었다. 최근에는 진수내 바로 옆에 타운하우스와 카페 등이 들어서서 평일에도 관광객들이 많이 찾고 있었다.
진수내가 속한 천미천은 올해 한국내셔널트러스트가 매년 발표하는 반드시 지켜야 할 자연유산에 선정되었다. |
그러나 이렇게 아름다운 진수내의 풍경도 얼마 전까지 하루아침에 사라질 위기에 처했었다. 천미천 정비 사업으로 제방을 쌓는 대규모 공사가 이곳에도 진행될 예정이었다. 천미천에 진수내와 같이 풍부하게 물이 고인 습지가 많이 형성될 수 있었던 것은 이 지역이 강수량이 많기도 하지만, 천미천이 나뭇가지가 뻗은 것처럼 수많은 지류를 가지고 있으면서 뱀처럼 구불구불한 사행천의 형태를 띠기 때문이다. 많은 비가 올 때 하천의 바위와 소(沼), 숲 그리고 구불구불한 지형은 물을 가두고 유속을 늦춰주는 역할을 한다.
이런 곳에 제방을 쌓아 나무를 베어내고, 곡선인 하천을 직선으로 만들고, 화산 암반층을 깨부수어 바닥을 평평하게 만들어 습지를 없앤다면 어떻게 될까? 지난 수십 년간 반복되어 온 천미천 정비공사 결과는 오히려 물살을 빠르게 모아 거세게 흐르도록 물길의 고속도로를 내어버린 결과를 가져왔다. 대량으로 흐르는 급물살은 토양을 유실시키고 육상의 토사물과 쓰레기를 여과 없이 바다로 흘려보내 문제가 되기도 했다.
제주의 시민환경단체가 그간 꾸준히 이런 부분에 대해 문제제기를 해온 결과, 천미천은 올해 한국내셔널트러스트가 매년 발표하는 반드시 지켜야 할 자연유산에 선정되었다. 그리고 최근에는 진수내가 포함된 천미천 구간의 공사도 전면 중단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을 신문기사를 통해 접했다.
진수내는 물이 맑고 주변 경치가 아름다워 제주의 숨은 비경으로 사람들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되었다. |
진수내의 경치를 즐기러 오는 사람들이 천미천이 그간 겪은 시련도 조금은 알았으면 싶은 마음이 든다. 자연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무상으로 사람들에게 휴식과 치유를 주는 것 같지만 또 한순간에 인간의 손길에 사라져버릴 정도로 연약하기도 하다. 수만 년의 세월이 만든 용암 하천과 화산석과 숲, 거기에 깃들어 사는 생명들, 우리 역시 그 곳에 잠시 깃들어 사는 연약한 존재라는 걸 늘 뒤늦게 깨닫게 된다.
올 여름 제주는 50일이 넘는 최장 기록의 열대야를 기록하고, 두 달 가까이 가을 가뭄이 이어졌다. 이렇게 뚜렷한 기후변화를 피부로 느낄 때마다 ‘이래도 못 알아듣겠니!’하고 외치는 환청이 들리는 듯하다. 이제 제주의 자연은 더 버틸 수 없다고 온몸으로 호소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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