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악길 원시림 속 감춰진 산정화구호 습지

 수악길 원시림 속 감춰진 산정화구호 습지



2024. 10. 30 (수)

글/사진_습지블로그 서포터즈 양정인




한라산 둘레길 수악길의 산정화구호 습지. 한라산 고지대 동남사면에 자리하고 있다.

한라산 둘레길을 걷다 보면 한라산이 생기고 제주 섬이 생겨나는 수천만 년 과정에서 흘러나온 많은 양의 용암류와 화산쇄설물이 남긴 다양한 흔적을 만난다.

해발 600~800m 한라산 중턱 천연림 속을 통과하는 트레킹 코스이기에 탁 트인 경관을 보기는 어렵지만 화산 활동의 결과물인 오름과 굼부리, 계곡, 빌레, 화산탄, 궤와 같은 지형이 만들어낸 비경과 그 안에 담긴 장엄한 창조의 순간을 엿보게 된다.

한라산 둘레길 수악길을 걷다가 산정화구호를 만났을 때 역시 깊은 인상을 받았다.
안내판이 없었더라면 이곳이 물영아리나 물장오리의 산정화구호와 같은 습지라는 것을 몰랐을 것 같다. 주변의 경사진 지형에 의해 굼부리(분화구) 형태가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고 감춰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시림이 이어지다가 일부러 다져 놓은 듯 넓고 평평한 지형이 갑자기 드러났을 때, 신비롭고 아늑한 느낌이 들면서 예사롭지 않은 공간으로 다가왔다.


수악길 산정화구호 습지의 환산체 형태는 대부분 사라지고 분화구 흔적만 남아있다.

안내판의 설명을 보면 이곳은 제주의 대부분의 오름들처럼 분석구로서 원래는 오름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그 모습은 가까이에 있는 동수악과 같았을 것으로 추측한다.

하지만 지금은 오름의 형태는 대부분 사라지고 분화구의 흔적만 남아있다그 이유는 한라산 고지대에서 연속적으로 용암이 흘러나오면서 화산체의 대부분 메워졌기 때문이다

 * 분석구 : 뿜을 분() 돌 석() 언덕 구(). 분석은 마그마가 폭발할 때 생겨난 용암 파편(화산쇄설물) 중 물에 가라앉는 돌(스코리아 scoria)이다. 제주에선 송이라고 부른다. 분석구(scoria cone)는 화산이 폭발하고 난 뒤 분석이 화구 주위에 엉켜서 화산체를 만든 화산이다. 

 

누운기장대풀

화구호 바닥에는 누운기장대풀과 솔이끼가 융단처럼 깔려있다.

습지 주변에 많이 보이는 뱀톱

습지 곳곳에 자리잡기 시작한 꽝꽝나무

오랜 가뭄으로 산정화구호 습지는 물이 말라있는 상태였지만, 비가 많이 올 때는 일시적으로 물이 고이는 습지 형태일 듯하다. 굼부리 바닥에는 제주에서 볼 수 있는 누운기장대풀과 솔이끼가 융단처럼 빽빽하게 깔려있고 곳곳에 뱀톱도 많이 자라고 있다.
그러나 습지가 육화되기 시작할 때 선구식물로 자리잡는 꽝꽝나무가 곳곳에 자리 잡은 모습도 보인다.

북방산개구리

대륙유혈목이

수정난풀

사철란

털사철란

여름을 지나 가을로 접어드는 숲에는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북방산개구리들이 폴짝폴짝 낙엽 사이로 뛰어다니고 대륙유혈목이가 흔하게 눈에 띈다.
이들에겐 다가올 겨울을 준비하느라 바쁜 시기인가 보다. 무성한 낙엽 속에는 제주에서도 드물게 볼 수 있는 희귀식물들인 수정난풀, 털사철난, 사철난이 작은 요정처럼 숨어있다. 유래 없는 긴 더위와 가뭄 때문일까, 올해는 더욱 눈에 잘 띄지 않는다.

큰오색딱따구리

황칠나무 낙엽

종가사나무 열매

졸참나무 열매

간간이 큰오색딱따구리가 부지런히 나무를 쪼아대는 소리가 들려온다.
바람이 없는 날인데도 걷는 내내 바스락 바스락 무언가 계속 숲 바닥에 떨어진다. 가끔 종가시나무, 졸참나무 도토리 열매에 꿀밤을 맞으며 걷는다가을로 접어드는 숲길 바닥에는 떨어진 도토리 열매가 가득하다. 한라산이 자생지인 황칠나무의 낙엽도 반갑게 눈에 띈다.

수악길은 돈내코 탐방로에서 이승악 사이 11.5km 구간이다.

수악길 산정화구호는 한라산의 동남사면에 위치하고 있다. 한라산 돈내코 탐방로 수악길 방면에서 출발하면 5.9되는 지점이다. 5.16도로 한라산둘레길 버스정류장에서 돈내코 방향으로 들어오면 1.8지점에 위치한다.

화산활동을 설명할 때 오름과 굼부리, 송이 등 오래전부터 불러오던 이름은 쉽게 다가오지만 생경한 학술용어들은 얼른 이해하기가 어렵다. 당연히 이 곳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불러온 이름도 있을 테지만 그 이름들이 잊혀가는 게 아쉽다.

수악(水岳)이란 이름도 물오름이란 옛 이름을 한자어로 바꾸어 붙인 지명이다. 한라산 둘레길 이름을 수악길로 부르지만 물오름길이라 붙였으면 어땠을까? 다른 한라산 둘레길 이름이 숯모르길, 절물길, 사려니숲길, 돌오름길 같은 옛부터 부르던 이름을 사용했듯이 말이다.

내친김에 수악길에 감추어진 이름 없는 산정화구호 습지의 이름도 불러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름의 형체가 사라져서 따로 이름이 붙여지지 않았다 해도, 그 오름의 분화구 흔적은 남아있고 그 장소에서만 볼 수 있는 동식물들이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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