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산리 습지 - 난산리의 한못 -찌구물(찍구물)과 사려물
난산리 습지- 난산리의 한못-찌구물(찍구물)과 사려물
2024. 10. 04(금)
글_습지블로그 서포터즈 오은주
사진_ 성산읍습지조사팀
난산리(蘭山里) 마을은 1970년대 난산리 면의마루 동네에서 마제석기가 출토(마을 홈페이지)된 것으로 보면 신석기 시대에도 이 지역에 사람이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설촌 년대가 1천년으로 추정되는 유서 깊은 마을이다. 998∼1009년간에 ‘새슬'이라 불리는 곳에 경주김씨가 설촌 거주했으나, 조선중기(남제주군고유지명에서는 고려중기 1277년이라 함)에 군위오씨가 ‘난미’로 불리는 현 위치에 들어와 살면서 주민들이 이주했고 마을이 커졌다고 한다.
풍수지리설로 지형이 난초형이라 하여 난산리의 옛이름을 보면, 난초들이라고도 불렀다고 하는데「탐라지도」에는 亂禿村, 「제주삼읍도총지도」에는 亂毛村, 「호구총수」정의 촌읍면에는 蘭山里, 「제주읍지」정의현 방리에는 難山里로 표기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난믜마을 또는 난미마을로 발음해야 할 것이다. 난믜, 난메, 난미의 뜻은 확실하지 않은데, 나지막히 넓게 퍼진 산을 뜻하는 말로 보인다. 한편 17세기말 지도인 「탐라도」에는 難野村(난드르마을)이다.
난산리는 중산간 마을이며 남으로는 삼달리, 북으로는 수산리, 서북쪽으로는 8km거리에 성읍리가 있고, 남동쪽으로는 해안마을 신산리가 있다. 난산리의 자연마을은 상동, 하동 2개 마을인데, 마을 자체에서는 상동, 중동, 하동, 서동, 동동, 남동 등과 같이 6개 마을로 구분한다.
식수는 용천수가 없어서 조선물, 몬저리물, 아부물, 문세기물, 앞새물, 동물, 조개물 등의 봉천수를 이용했다. 우마급수용으로는 곰베물, 사려물, 지꾸물, 매구렁, 월랑지 등이 있었다. 토지가 비옥해서 곡식이 잘되어 마을형성에 있어서도 천혜의 입지조건이 되었다.
난산리는 신생대 제4기초에 일어난 용암분출로 형성되었다. 1m정도 토양을 걷어내면 현무암질 용암이 식어 형성된 지층이 존재한다. 난산리의 지형경사는 완만한 편이나 곳곳에 평지보다 높고 다소 경사가 있는 지형 즉, ‘동산’들이 많이 존재한다. 상듸동산, 선비동산, 장짓동산,가지물동산, 잣비도독동산, 문데기동산, 개동산, 소남동산, 추추리동산, 사려물동산, 돌동산, 알미드르동산, 초남동산이 그 사례이다. 경사가 완만하고 넓은 동산을 의미하는 ‘모루’도 존재한다.
화산 활동을 통해 형성된 대표적인 화상지형으로는 용암동굴과 오름등이 있다. 난산리 2225번지 지하에는 ‘수산동굴’로 명명된 용암동굴의 일부가 존재한다.
난산리 2220번지 일대의 암반이 깔린 언덕빼기에 연못이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제3 급수지로 옛날에는 우마를 먹이는 물로 이용했으며 동쪽 작은 못은 식수로 이용하였다. 현재는 연꽃이 거의 꽉 차 있다.
찍구물은 난산리에서는 난산 한못이라 한다. ‘한’의 의미는 크다라는 것이다.
표지판에 잘못 표시된 줄 알고 이장님께 전화를 드린 경험도 있었다. 한못이라 하면 수산 한못만 있다고 생각하는 생각의 고정에 다시 생각해 본 기회였다.
2023년 성산읍 습지조사를 다니고 있었을 때, 지인이 전화를 주셨다. 찍구물에 전주물꼬리풀를 복원했다고 알려주셨다. 며칠 후에 가 보니 습지의 수변가로 무더기 무더기 심어져 있었다. 여미지식물원에서 증식하여 식재해 놓은 것이었다.
연꽃이 습지 가득인데, 잘 견딜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2024년 확인해 보니 입구 쪽은 보이지 않았고, 안쪽으로 들어가 가운데에 마름이 우점해 있는 수변 가에서 힘을 내어 자라고 있었다.
계속 모니터링이 필요한 듯 하다.
주변 풍경이 뛰어나 우도와 성산일출봉도 한 눈에 들어오며 후손에게 물려 줄 중요한 유산이다 (안내판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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