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동산 애기구덕물
글, 사진 : 습지블로그 서포터즈 양정인
선흘 곶자왈 동백동산에는 상록성 참나무인 종가시나무, 참가시나무, 개가시나무, 붉가시나무가 있다.
그 중에도 종가시나무가 주종을 이룬다.
툭 툭, 따닥 따닥, 투둑 투두둑...... , 도토리 비 소리는 장작 타는 소리를 닮았다.
사계절 숲 바닥을 초록으로 물들이는 키 작은 자금우는 빨간 열매를 맺기 시작하고, 제주고사리삼도 귀여운 포자낭을 뾰족하게 올린다. 애기구덕물 주변에 있는 사스레피 나무에도 까만 쥐똥 같은 열매가 달렸다.
애기구덕물은 제주시 조천읍 선흘리 마을 숲인 동백동산 안에 있는 여러 습지 중 하나이다.
깊이는 80센티 남짓하고 아기를 재울 때 쓰는 요람 정도의 크기라 애기구덕물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구덕’은 제주어로 ‘바구니’를 뜻한다.
제주에서는 예전에 대나무를 엮어 만든 애기구덕에 아기를 재우기도 하고 눕혀놓기도 했다.
동백동산습지센터 입구에서 얼마 멀지 않은 600미터 정도 되는 지점에 애기구덕물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습지는 아닐까 싶게 앙증맞다. 얼핏 보기엔 작고 평범한 구덩이처럼 보인다. 누군가 얘기해 주지 않는다면 예전에 습지였는지도, 마을사람들이 날마다 물을 길어다 먹던 물통이었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애기구덕물은 화산활동의 결과로 만들어진 작은 ‘궤’이다.
바위그늘이나 절벽, 동굴의 형태와 비슷하게 땅 속으로 깊이 패어 들어간 바위굴을 말한다.
애기구덕물을 자세히 살펴보니 절벽 밑 그늘 같은 지형에 구덩이가 움푹 패여 있다. 화산 활동의 결과로 만들어진 지형인 ‘궤’는 바위그늘이나 절벽, 동굴의 형태를 하고 있다. 용암이 흐르던 끝 부분이 함몰되거나 깨지면서 만들어진다. 제주 곳곳엔 유명한 궤들이 많지만 이렇게 작은 궤에도 물이 고여 마을의 식수로 쓰이고 애기구덕물이란 귀여운 이름까지 붙었다.
원래 애기구덕물은 주변보다 지대가 높음에도 물이 고이는 특징이 있다지만 가을 가뭄이 두 달 가까이 계속되고 있어서인지 주변은 많이 건조해 보였다. 애기구덕물 근처에 이제 막 빨간 열매를 맺은 자금우도, 백량금도 잎과 열매가 힘없이 메마른 모습이었다. 주변의 참가시나무나 사스레피 나무도 열매를 맺는 중이었지만 역시 수분이 많이 부족해 보인다.
동백동산 곳곳엔 넓고 평평한 화산 암반인 빌레지대가 있다. |
동백동산의 지질을 알고 나서야 이 숲에만 들면 유난히 습하게 느껴지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제주 중산간 지대에 분포하는 곶자왈은 오름의 화산 폭발로 생겨난 돌무더기에 들어선 숲이다. 곶자왈의 지반은 용암이 쪼개지면서 만들어진 돌무더기와 함몰지, 풍혈지, 궤, 용암동굴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기에 물이 고이기 어렵고 습지가 만들어지기 어려운 지형이다.
선흘 곶자왈인 동백동산 역시 거문오름의 화산활동 결과로 곳곳에 다양한 용암지형을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동백동산은 독특하게도 점성이 묽은 파호이호이 용암이 흘러내리다 굳은 넓고 평평한 암반지대가 곳곳에 형성되어 있다. 제주에서는 ‘빌레’라고 부르는 지형으로 이런 곳엔 비가 내리면 물이 빠지지 않고 물이 고이게 된다. 동백동산 곳곳이 그런 지질로 되어 있기에 숲 전체가 거대한 물그릇 역할을 한다.
먼물깍.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의미의 ‘먼 물’과 끄뜨머리를 이르는 제주어 ‘깍’이 합쳐진 이름이다. 소와 말에게 물을 먹이고 빨래도 하고 목욕도 했던 물통이었다. 넓은 암반인 빌레 지형이 주변에 있어 예전에는 빨래판으로도 사용했다고 한다. 먼물깍은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한번도 물이 마른 적이 없다고 한다. |
제주의 중산간은 물이 귀하기에 마을에 수도시설이 들어오기 전 숲의 습지는 마을 주민들에겐 더없이 귀한 장소였다. 식수와 생활용수는 물론이고, 마소를 키우고 농사짓는 용도로도 쓰였다. 숯을 굽는 숯막도 습지와 가까운 장소에 지었다. 마을에서는 습지마다 이름을 붙이고 물통으로 관리했다. 물이 고이기만 한다면 애기구덕물 같은 작은 습지도 귀한 식수원이었기에 주변의 낙엽들을 청소하고 깨끗하게 관리했다. 동백동산에는 그렇게 사용하던 물통이 100여 개 가까이 되었다.
새로판물. 동백동산 서쪽입구에서 약 500m 지점에 있다. 마을사람들이 소와 말에 물을 먹이기 위해 삽과 골채, 삼태기를 이용해 공동으로 흙을 파내고 돌담을 쌓아 넓혀서 물통을 만들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
봉근물, 줄렛못, 엉덩물, 개뽈은물, 새로판물, 돗썩은물, 김녕시집가는물, 도틀물, 먼물깍, 애기구덕물...... 마을의 어른들에게 전해오는 물통에 얽힌 일화는 물통에 붙인 이름만큼이나 습지와 밀착된 삶을 반영하여 애틋하면서도 정겹다.
공동수도가 없던 시절 마을 사람들의 하루는 제일 먼저 그 날 쓸 물을 긷는 일부터 시작되었다. 동트기 전부터 마을의 여인들은 물허벅을 지고 숲으로 들었다. 습지의 물도 빗물이 고인 것이기에 마냥 풍족하진 않았다. 일찍 일어난 사람들이 숲의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도틀물의 물을 길어 가면 그 다음 사람은 애기구덕물까지 와서야 물을 얻을 수 있었다. 딱 한 사람 길어갈 정도의 양인 애기구덕물에 물이 비면, 그 다음 물통으로 갔다. 그렇게 2킬로미터 정도 더 걸어서 먼물깍까지 가서 물을 길어오기도 했다.
마을과 숲이 함께하던 시절의 이야기들을 상상해보니 그때의 애기구덕물 모습은 어땠을까 궁금해졌다. 지금은 마른 낙엽만 가득 쌓였지만 비가 내린 뒷날이라면 애기구덕물에도 물이 고일까?
비온 뒤 동백동산은 곳곳에 일시적으로 습지가 형성되었다가 서서히 물이 빠진다. |
두 달 넘게 이어지던 긴 가을가뭄이 끝나고 드디어 단비가 내린 날, 애기구덕물을 찾았다. 그 사이 동백동산에는 겨울딸기가 빨갛게 익어가고, 건습지였던 곳곳에 물이 고인 모습이 보였다. 동백동산의 지질과 습지에 대한 이해가 없었다면 비온 뒤 이런 흙탕물 웅덩이는 반갑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젠 습지가 충분히 물을 머금을 수 있겠구나, 습지에 사는 식물들도 해갈이 되겠구나 하는 안도감을 가지고 바라보게 된다.
하지만 애기구덕물에는 낙엽이 많이 쌓여서인지 물이 고인 모습을 볼 수는 없었다. 애기구덕물 역시 도틀물이나 다른 습지처럼 육화되어가는 중일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애기구덕물을 사용하지 않기에 매일 물통 안과 주변의 낙엽을 치울 일도 없다. 동백동산을 산책하는 사람들이 간간이 애기구덕물 앞을 지나갔지만 애기구덕물의 존재를 알아보는 사람들도 없었다.
그렇게 이 작은 애기구덕물도 잊혀져갈까? 아마도 람사르습지로 등재되고 습지보호지역인 동백동산 안에 위치하지 않았다면 사라지는 줄도 모르게 사라져간 다른 습지들처럼 난개발 속에 매립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바람결에 도토리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애기구덕물 안에도 떨어진 도토리들이 보였다. 가만히 애기구덕물 안을 들여다보자니 문득 애기구덕물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있었다.
나를 잊지 않고 찾아줘서 고마워.
예전엔 내가 마을사람들에게 생명의 물을 주었지만
이젠 마을사람들이 나를 지키고 보호해주네.
나는 예전처럼 맑은 물을 품는 꿈을 꾸고 있어.
동백동산 물통들마다 물이 마르지 않기를,
먼 나라를 여행하던 철새들도 이곳에 깃들어 편히 머물기를,
긴꼬리딱새, 팔색조도 찾아와 목을 축이기를.
선흘리 동백동산습지센터 탐방로 입구에는 마을 주민들이 의견을 모아 세운 표지판이 눈길을 끈다. 예전부터 숲과 함께해온 마을 주민들의 숲에 대한 애정과 숲을 지키고 돌보고자 하는 책임감과 열의가 느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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