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암 지형 빌레에 만들어진 습지, 흐린내

글, 사진 : 습지블로그 서포터즈 양정인


전주물꼬리풀 꽃. 제주 조천읍 선흘리 흐린내 습지. (2022. 08. 25 )


전주물꼬리풀 꽃이 피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듣고 아침 일찍 흐린내생태공원 습지를 찾았다. 습지에 도착한 순간 절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전주물꼬리풀 꽃이 습지를 온통 연보라 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오랜만에 찾은 흐린내는 지난 봄에 찾았을 때완 사뭇 다른 분위기와 생명력이 가득했다. 멸종위기종인 전주물꼬리풀을 보기 위해 발걸음을 했던 거였지만 습지에는 다양한 동식물들이 저마다 존재감을 내뿜고 있었다. 


어리연꽃과 거미

송이고랭이에 앉은 잠자리

연잎 위 아침이슬과 매뚜기

통발꽃

습지 풀숲에 숨은 개구리

 어리연꽃, 좀어리연꽃, 고마리, 통발꽃, 송이고랭이 등 습지 식물들이 절정을 이루었고 그 위를 색색의 잠자리들이 어지러이 날아다녔다. 연잎에는 아침이슬이 금강석을 뿌려놓은 듯 반짝이고 이따금 개구리가 물에 첨벙! 뛰어드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습지의 여름이 이렇게 다채롭고 아름다웠다니! 


흐린내의 빌레 지대.(2022.04.30)
빌레는 점성이 약한 파호이호이 용암이 흐른 뒤 평평하게 굳어지며 만들어진 암반지대이다. 


흐린내는 빌레 지대가 평평하게 펼쳐지면서 그 사이사이 습지가 형성돼 있어서 가까이서 습지를 감상하고 관찰하기에 좋다. 잠시 너럭바위 빌레에 자리 잡고 앉으니 불어오는 바람이 땀을 식혀준다. 더울 땐 나무그늘 밑 빌레에 앉으면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고, 추울 땐 또 햇볕에 달궈진 빌레가 온돌처럼 따뜻하다. 흐린내 습지는 화산섬 제주의 독특한 지질학적 특징 때문에 형성된 빌레못이다. 


흐린내의 봄. 빌레못에 뭉게구름이 비친다. (2022.04.30) 

약 8천년 전으로 추정되는 시기에 지금의 제주시 조천읍 선흘리와 구좌읍 덕천리 일대에는 거문오름의 화산 폭발이 있었다. 이때 흘러내린 용암 중 점도가 낮은 파호이호이 용암이 제주 동부 지역 곳곳에 넓고 평평한 판 형태로 굳어져 암반지대를 형성했다. 이런 지형을 제주에선 빌레라고 한다. 
빌레에 흙이 쌓이면서 천연 방수가 되어 마치 물그릇처럼 비가 오면 물이 고이고 습지가 형성되었다. 그런 못을 빌레못이라고 불렀다. 물이 귀한 섬에선 예로부터 이런 습지의 물도 귀하게 여겨 식수와 생활용수를 비롯해 농사짓고 마소를 기르는 데 요긴하게 쓰였다. 그러나 상수도가 공급되면서 습지의 쓰임이 잊혀져가고 무분별한 개발 속에 많은 습지가 사라지거나 훼손되기도 했다. 


전주물꼬리풀은 꿀풀과 여러해살이 풀로 꽃은 연보라색으로 8~10월에 핀다.
꽃대에 작은 꽃들이 촘촘히 달린 모양이 복슬복슬 한 동물의 꼬리를 닮아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전라도와 제주도, 세계적으로는 일본, 만주, 우수리 지역에서 분포한다. 

습지에 자라는 전주물꼬리풀 역시 습지와 그 운명을 같이 했다. 물이 깊지 않으면서 햇빛이 잘 드는 습지 가장자리나 연못에 서식하는 전주물꼬리풀은 예전에는 농수로나 웅덩이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식물이었다. 하지만 급격한 도시 개발 과정에서 습지가 사라지면서 전주물꼬리풀 역시 자취를 감추었다. 전국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아 절멸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지만 1980년대 중반 제주 동부 지역 습지에서 가까스로 다시 발견되었다. 
제주도 해발 130m 정도의 저지대 습지에 자생하는 식물인데 이름에 '전주' 지명이 붙은 까닭은 처음 발견된 곳이 전주 지역이기 때문이다. 1912년 일본 식물학자에 의해 전라북도 전주의 한 습지에서 채집되었고, 1969년 전주의 지명을 따 우리말 이름인 ‘전주물꼬리풀’로 명명되었다. 

제주 성산읍 수산리에 있는 수산한못 습지에도 전주물꼬리풀이 피었다.(2022. 08.29)
전주물꼬리풀 자생지 보전 및 확장을 위해 2013년에 복원 식재 되었다.


환경부는 2012년 전주물꼬리풀을 멸종위기야생식물 2급으로 지정했다. 그 후에 전주물꼬리풀 소수 개체가 자생하던 제주도 성산읍 수산한못 습지에 복원 식재를 성공하고 생육환경이 비슷한 제주 다른 여러 습지에도 복원 활동이 이루어졌다. 뿐만 아니라 제주에서 가져간 종자가 2013년 전주 습지에 꽃을 피워 100년 만의 귀향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최근 습지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고 마을마다 습지보전 활동이 이뤄지면서 전주물꼬리풀의 복원도 함께 이루어지고 있기도 하다. 이제는 제주 습지 여러 곳에서 전주물꼬리풀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제주는 습지보호를 위한 국제협약인 람사르협약에 의해 다섯 곳의 습지가 람사르습지 인증을 받았고, 제주시 조천읍과 서귀포시 남원읍 두 곳이 람사르습지도시 인증을 받았다. 람사르습지도시는 람사르습지 인근에 위치하고, 습지의 보전과 현명한 이용에 지역사회가 모범적으로 참여하고 활동한 도시나 마을로 람사르협약에 따라 인증을 받는다. 흐린내 습지가 위치한 조천읍 선흘리 역시 람사르습지도시에 속한다. 



흐린내는 과거에는 수량이 풍부해서 동네 아이들이 수영을 배우는 곳이기도 했다. 
지금은 생태공원으로 정비되어 습지를 둘러볼 수 있게 데크가 설치되고 
습지 주변에 200미터 정도의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다. (2022.08.25)

습지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엄청난 역할을 수행한다. 습지는 생물 종의 40%가 사는 생태계의 보고이다. 안정된 생태계 유지와 생명다양성에 있어 습지의 역할은 크다. 또한 온실가스와 탄소 흡수량이 엄청나기에 습지는 최근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는 기후변화 해결의 열쇠로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습지의 토양정화는 물론 대기의 온도와 습도를 조절해 공기를 맑고 깨끗하게 하는 역할까지 한다. 
제주 역시 기후변화와 환경오염, 지하수의 오염과 고갈이라는 심각한 문제에 당면해 있다. 화산활동의 결과로 독특하면서도 다양한 습지를 많이 가지고 있는 제주는 섬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습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 만큼 제주 곳곳의 습지 하나하나 모두 보전해나가야 할 소중한 장소이다.

흐린내생태공원은 제주시 조천읍 선흘2리 선인동에 위치한다.
선흘 2리는 해발 200m~400m의 중산간 평지에 자리한 마을이다.
선흘리에 있는 거문오름은 유네스코가 선정한 세계자연유산으로,
선흘 2리는 이를 보존하기 위한 세계 자연유산마을로 지정돼 다양한 생태활동이 이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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