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2026 세계 습지의 날 기념 ①

 습지는 자연의 촘항


[특별기고] 2026 세계 습지의 날 기념 ①

매년 2월 2일은 람사르 협약이 지정한 ‘세계 습지의 날’이다. 올해 2026년의 주제는 ‘습지와 전통지식(Wetlands and traditional knowledge)’이다. 이는 습지 보전이 단순히 물리적인 자연환경을 지키는 것을 넘어, 그 터전 위에서 오랜 시간 축적되어 온 인류의 생태적 지혜를 계승해야 함을 의미한다.

제주 사람들에게 물은 생존과 직결된 화두였다. 제주는 강우량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투수성이 좋은 지질 특성 탓에 빗물이 곧바로 지하 깊숙이 스며든다. 용천수가 솟는 해안가를 제외하면 지표수를 구하기 힘든 지역이 많았다. 이런 특수한 환경에서 선조들이 고안해 낸 지혜가 바로 ‘촘항’이다. 굵은 나무줄기에 띠(새)를 엮어 만든 촘을 감아, 이를 타고 흘러내리는 빗물을 항아리로 유도해 물을 모으는 방식이다. 또 물이 담긴 항아리에 살아 있는 개구리를 넣어 수질을 확인했다는 기록은 제주인들에게 물이 얼마나 절실했으며, 그 물을 지키기 위해 어떤 지혜를 발휘했는지 잘 보여준다. 촘항은 한 방울의 물도 허투루 쓰지 않겠다는 절약의 정신이자,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지 않고 필요한 만큼만 얻어 쓰는 공존의 기술이었다.

자연의 촘항 습지, 람사르습지 중 물장오리오름 습지. 사진제공=제주생태관광지원센터<br>
자연의 촘항 습지, 람사르습지 중 물장오리오름 습지. 사진제공=제주생태관광지원센터
자연의 촘항 습지,&nbsp;동백동산 먼물깍 습지. 사진제공=제주생태관광지원센터<br>
자연의 촘항 습지, 동백동산 먼물깍 습지. 사진제공=제주생태관광지원센터

관점을 확대해 보면, 습지는 곧 ‘자연의 촘항’이다. 선조들이 마당에 항아리를 두어 식수를 담았듯, 자연은 대지 위에 습지라는 그릇을 두어 빗물을 머금는다. 자연이 만든 촘항인 습지는 빗물을 가두어 지하수를 함양하고, 홍수를 조절하며, 뭇 생명들이 살아갈 물을 내어준다.

자연의 촘항이 품은 물의 가치는 지금 이 시기, 습지를 찾는 생명들에게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한겨울 추위가 채 가시지 않은 지금, 제주도롱뇽과 북방산개구리는 산란을 위해 가장 먼저 습지를 찾는다. 봄철 번식을 준비하는 숲의 새들에게도 습지는 필수적인 식수원이자 목욕 장소이다. 계절이 흘러 장마가 시작되는 6월 무렵이 되면 멸종위기야생생물인 맹꽁이가 긴 잠에서 깨어 습지를 찾고, 잠자리와 물장군을 비롯한 온갖 곤충도 습지에 기대어 산다. 촘항에 물이 말라버리면 집안의 생존이 위태로웠듯, 습지가 사라지면 이들의 서식과 번식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올해 세계 습지의 날 슬로건은 습지를 "신성하고 생명을 지탱하며, 시대를 초월한 유산이자 우리가 지켜야 할 것(Sacred. Life-sustaining. A timeless legacy. Ours to protect)"이라고 정의한다. 이 문구는 제주의 촘항과 정확히 맞닿아 있다. 뒷마당 촘항에 모인 물이 가족 구성원에게 더없이 귀한 생명수였듯, 습지는 제주의 생태계를 지탱하는 귀한 자원이다. 또한 촘항과 같은 전통 지식이 세대를 이어 전해졌듯, 습지는 우리가 후대에 온전하게 물려주어야 하는 시대를 초월한 유산이다.


겨울에 산란하는 제주도롱뇽. 사진제공=제주자연생태공원
겨울에 산란하는 제주도롱뇽. 사진제공=제주자연생태공원
제주도롱뇽 알. 사진제공=제주자연생태공원<br>
제주도롱뇽 알. 사진제공=제주자연생태공원

이번 제주시 람사르습지도시에서는 습지의 날 행사로 이 오래된 지혜를 재현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행사 참가자들이 직접 촘항을 만들어 나무에 설치하는 체험이다. 과거의 촘항이 사람을 살리는 식수원이었다면, 이번에 재현하는 촘항은 가뭄에 목마른 나무와 새들에게 물을 내어주는 쉼터가 된다. 옛 방식 그대로 항아리에 물을 담아 생명을 살리고, 옛 지식을 빌려 숲의 생태를 돕는 과정을 통해 전통 지식의 현대적 가치를 되새기고자 한다.

이는 거창한 환경 운동이라기보다 잊혀가는 ‘물의 가치’를 기억하는 행위다. 현대 사회는 수도꼭지만 틀면 물이 쏟아지기에 물을 무한한 자원으로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제주 땅에 내리는 빗물의 총량은 정해져 있다. 우리가 생활 속에서 끌어다 쓰는 물은, 본래 습지에 고여 다른 야생 생물들이 나누어 마셨어야 할 몫이기도 하다. 결국 물을 아껴 쓰는 일은 단순히 비용을 줄이는 차원이 아니라, 한정된 빗물을 숲속의 생명들과 공평하게 나누는 배려이자 공존의 윤리다.

습지는 새들의 생명수, 바위 사이 물이 고인 습지에서 더위를 식히는 방울새. 사진제공=제주생태관광지원센터
습지는 새들의 생명수, 바위 사이 물이 고인 습지에서 더위를 식히는 방울새. 사진제공=제주생태관광지원센터
습지의 건강성을 나타내는 지표식물, 물장오리의 송이고랭이. 사진제공=제주생태관광지원센터
습지의 건강성을 나타내는 지표식물, 물장오리의 송이고랭이. 사진제공=제주생태관광지원센터

그 사이 제주의 천연 물탱크인 습지들은 개발 논리에 밀려 메워지거나 오염되고 있다. 촘항이 깨지면 더 이상 물을 담을 수 없듯이, 습지가 파괴되면 제주의 생태적 수용력도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단순히 습지라는 물리적 공간만이 아니다. 그 안에 담긴 물을 귀하게 여기고 자연에 순응하는 태도이다.

임형묵. ⓒ제주의소리
임형묵. ⓒ제주의소리

세계 습지의 날을 맞아, 나무줄기에 띠를 둘러 빗물을 한 방울씩 모았던 선조들의 마음을 떠올려본다. 우리가 습지라는 항아리를 온전히 지켜낼 때 비로소 제주의 미래도 그곳에 고일 수 있다. 깨진 항아리에는 물이 고이지 않는다. 우리 곁에 있는 오름과 바다, 습지는 자연이 우리에게 내어준 소중한 ‘촘항’임을 다시금 상기하며, 2월 2일 세계 습지의 날에 진행되는 제주시 람사르습지도시의 ‘촘항 만들기’를 응원한다. / 임형묵 제주특별자치도 생태관광지원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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