돔배물
돔배물
2024. 12. 26 (목)
글/사진_습지블로글 서포터즈 변재환
제주의 전형적인 농촌 마을의 특징인 돌담과 주택, 마을 안길 및 농로 등이 잘 보존돼 있는
한라산 중턱에 자리한 마을 어음2리를 찾았습니다.
한라산 중턱에 자리한 마을 어음2리를 찾았습니다.
어는 마을이든지 마을이 형성되려면 생명수인 물이 있어야 하는데
어음2리 마을 입구에도 주민들의 생명수였던 돔배물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돔배물은 이 마을 중심 도로변에 잘 정비되어 있어, 마을 주민들의 쉼터 역할을 하는
공원으로 활용되고 있고 130여 가구에 250여 명의 주민이 거주하는 어음2리는
동동과 서동 등 2개의 자연 부락으로 이루어진 애월읍에서 제일 높은 마을로
브로콜리와 수박, 양배추가 많이 재배되는 농촌 마을입니다.
돔배물 앞에는 제주시 애월읍 어음2리 설촌 유래에 대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고
문헌상 전하여 오는 것은 없고, 조선 시대(연산군) 갑 자사화 당시 홍문관 교리였던
정자 박후신이 노복 30여 명을 거느리고 유배되어, 이곳에 거주한 것이
어음2리 설촌 시초라고 합니다.
그리고
어음리 지역은 예로부터 '어름비', '부면이'라고도 불리는데, 특히 '부면이'란 지명은
1653년(효종 4년) 이원진 편찬의 '탐라지'에서 확인되며 일제강점기로 들어선 1916년에는
어음리 지역이 1구와 2구로 분리됐습니다. 예전의 어음리 소속 마을과 부면리 소속 마을
중심으로 나눈 것으로 1945년 해방 후에는 어음1구와 어음2구를 합쳐 다시 어음리로
편입됐지만, 1948년 4.3으로 마을 전체가 불타는 아픔을 겪습니다.
이후 해안 지역 마을 등으로 잠시 내려갔다가 여건이 나아진 1949년 하동 '부멘이'가
재건되고 다음으로 1950년대 초반에 상동 '어름비' 일대가 재건됐습니다.
하지만 상동과 하동 지역 간 2.2km정도 떨어져 있어 행정 업무가 어렵다는 판단에
1963년부터 어음1리와 2리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설촌 유래 안내판 바로 옆에는 돔배물에 대한 안내문이 세워져 있습니다.
돔배물에 대한 전해오는 이야기는 2가지 있다.
하나는, 지금으로부터 300여 년 전 고응삼이라는 풍수지리사를 마을에 초청하여 물이 잘 고이고 생수라도 나올 곳을 답사하던 중 이곳을 택하여 3질 이상(사람의 키 3배)을 파고 도마를 크게 만들어 상으로 이용, 제물을 올리고 정성으로 제사를 올지자 억수 같은 비가 쏟아지므로 도마 상도 철거하지 못하고 다음 날 가보니 그 급수장에는 물은 가득 차 있고
물 위로 떠올라 있어야 할 도마와 제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후 물밑에는 수량이 풍부한 생수가 솟아 아무리 가물어도 언제나 급수장에는
물이 가득 차서 급수에는 지장이 없었으며, 100여 년 후에야 제사를 지냈던 도마가 물 위로 떠올라
그 물은 '돔배물'이라 칭하고 그 전설은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돔배물(공이물)은 서쪽 하천변(정자내)에 맑고 가늘게 흐르는 샘물인데
속칭 공생이물이라 합니다. 이 샘물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고응삼이라 전하는데
고응삼은 신분이 천한 목자 출신이면서도 풍수지리에 신통력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명당을 찾기 위하여 산천을 헤매다가 물을 먹고 싶었으나 물이 없었고
그는 하천변 나무 그늘에 쉬면서 자세를 살펴보니 반드시 그 주변에 생수가 있으리라
판단하였고 사방을 두루 살펴보던 중 참새 한 쌍이 물에 흠뻑 젖어 바위틈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우거진 숲을 헤쳐 암반 속에서 생수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이후로 이 목자가 이곳에 정착하자 사람들은 그의 신안을 가려 '고응삼-샘'이라고 일컬었고,
어느 날 명당을 찾기 위하여 산천을 헤매다가 물을 먹고 싶었으나 물이 없었고
그는 하천변 나무 그늘에 쉬면서 자세를 살펴보니 반드시 그 주변에 생수가 있으리라
판단하였고 사방을 두루 살펴보던 중 참새 한 쌍이 물에 흠뻑 젖어 바위틈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우거진 숲을 헤쳐 암반 속에서 생수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이후로 이 목자가 이곳에 정착하자 사람들은 그의 신안을 가려 '고응삼-샘'이라고 일컬었고,
지금은 그 말이 축약와전되어 '공-샘'이라고 부릅니다.
지금은 식수로 사용되지 않고 있지만, 예전에는
위쪽 100여 평의 물은 상수도가 들어오기 전까지 식수용으로 이용하였으며,
아래쪽 200여 평 되는 연못은 가축 급수용으로 이용하였습니다.
조선 시대 제주 중산간은 마실 물이 없어 대다수 마을이 봉천수를 떠다 마셨고
지금은 농약을 사용하여 봉천수를 마실 수 없지만 당시만 해도 제주 중산간 마을마다
봉천수는 생명수 역할을 했던 물입니다.
제주 검은색 현무암으로 둥그렇게 쌓은 돔배물 풍경.
전에는 연못 둘레에 풀과 나무가 우거지고 가운데에는 물풀과 버드나무가 자라고 있었으나
2012년에 아래 연못 둘레를 자연석으로 말끔히 단장했다고 합니다.
주변을 공원으로 꾸민 모습도 인상적인 '돔배물'
돔배물을 정비하며 만든 목교와 여기서 조금 더 가면 운치 있는 정자가 나옵니다.
농천 마을이라 그런지 한적한 모습이고 찾는 이 또한 없어 나들이나
지나 실적에 잠시 들러 사진을 찍어도 좋겠단 생각이 듭니다.
제주 중산간이 난개발되며 훼손되는 곳이 많은데 마을 주민들이 돔배물을
보존하고 관리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고
돔배물 우측 한라산 방향으로 1.5km 정도에 위치한 세계에서 가장 긴 용암동굴인
'빌레못 굴'과 '빌레못'도 함께 탐방해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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