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목축문화와 생물다양성을 품은 물영아리 습지
물영아리 습지의 봄. 물영아리 오름은 서귀포시 남원읍 수망리에 속해 있다.
글/사진 : 습지블로그 서포터즈 양정인
한라산 백록담이나 백두산 천지처럼 산 정상에 물이 고여 있는 곳은 신령함과 신비로움을 느끼게 한다. 제주에는 화산 활동으로 생겨난 368여 개 오름들 중에도 백록담의 축소판처럼 오름 분화구에 물이 고인 곳이 열 곳 남짓 있다. 이런 곳들은 백록담이나 천지가 그러하듯 그 땅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신성하게 여겨왔다.
제주 서귀포시 남원읍 수망리에 있는 물영아리 오름 역시 그런 곳 중 하나다. '물영아리'라는 이름도 오름 정상 분화구에 물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제주어 '영아리'의 뜻은 여러 해석이 있지만 확실하게 밝혀진 바는 없다. 공통적으로 '신령스러움'과 관련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물영아리가 속한 수망리에 5대 째 살아온 주민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예전 물영아리 분화구의 물이 굉장히 깊어서 무서울 정도였다고 한다. 뗏목을 띄울 수 있을 정도로 깊어서 소가 빠져 죽은 적도 있고, 워낙 안개가 많이 끼는 곳이어서 신이 살고 있다는 얘기가 전해오기도 한다.1)
물영아리 오름과 주변 목장에서 방목하는 소들의 모습.
물영아리 오름은 삼나무와 편백나무 조림지, 참식나무, 생달나무, 새덕이 등 상록활엽수가 많아 사계절 푸르른 모습을 하고 있다.
물영아리 습지에 전해오는 이야기2)는 제주 중산간 지역에 위치한 마을 수망리의 오랜 목축 문화를 반영하고 있다. 물이 귀한 제주의 중산간에서 습지의 물이 목축에도 매우 귀중한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가뭄이 심해서 소들에게 먹일 물이 없으면, 물영아리 오름 분화구까지 가서 물을 먹이기도 했다고 한다.
초원에 우뚝 솟은 물영아리 오름 주변에는 드넓은 초지가 펼쳐져 있고 마을 목장에서 소들을 방목하고 있다. 탁 트인 푸른 초원에 한가로이 풀을 뜯거나, 누워 쉬는 소들의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도 평화롭다. 이런 환경 덕에 멸종위기종인 애기뿔소똥구리의 서식환경이 조성되어 있기도 하다.
물영아리 습지 가는 길은 소떼가 한가롭게 풀을 뜯는 목장 둘레를 돌아 시작된다.
물영아리 오름은 수망리 중잣성 생태 탐방로와 연계되어 있다. 잣성은 제주도의 전통적인 목축 문화의 유물로, 방목하는 말이나 소가 목장을 벗어나지 않도록 목초지에 쌓아 올린 경계용 돌담이다. 물영아리 오름 둘레길에도 잣성이 계속 이어져 있다.
오름 분화구의 습지를 만나러 가는 길은 '계단길'과 '능선길' 두 가지 길이 있다. 습지로 바로 연결된 가파른 계단길 보다는 조금 돌아가더라도 다양한 식물들과 풍경이 펼쳐지는 완만한 둘레길을 돌아 오르는 능선길을 추천한다.
물영아리 습지로 향하는 길목에서 만난 호자덩굴꽃.
습지가 육화되는 곳에 많이 보이는 꽝꽝나무에도 꽃이 피었다.
오름 분화구로 가는 길엔 새비나무, 박쥐나무, 구지뽕나무, 산뽕나무, 예덕나무 등 다양한 낙엽활엽수가 그늘을 만들어준다. 습지가 가까워올수록 꽝꽝나무가 많이 보인다. 꽝꽝나무는 물을 좋아해서 습지가 육지화 되어가는 곳에 많이 자란다. 나무마다 온갖 꽃이 피는 초여름, 꽝꽝나무에도 잘고 수수한 흰 꽃이 가득 피었다. 습지로 내려가는 길목엔 앙증맞은 호자덩굴꽃이 어두운 숲 그늘 아래서 유난히 희게 빛난다.
물영아리 습지에 찾아온 노루. 습지 식물 군락별로 경계가 뚜렷하게 나 있다.
숲이 우거진 나무계단을 내려와 뻥 뚫린 분화구에 들어서기 전엔 숨을 죽이고 발걸음도 조심스러워진다. 물가에 새들이 놀고 있거나 노루가 물 마시러 와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초여름 이른 아침 습지를 찾았을 때, 고요한 습지에는 어린 노루가 풀을 뜯고 있었다. 이제 막 올라오기 시작한 연한 습지 풀들이 맛난지 습지 주변을 한참 돌아다니며 풀을 뜯었다.
물영아리의 습지 식물들. 차례대로 송이고랭이, 바보여뀌, 물고추나물, 이삭여뀌
여름으로 향하는 물영아리 습지에는 제법 자란 습지식물들이 군락별로 뚜렷한 경계를 보인다. 습지 가장자리에는 복분자딸기- 좀찔레군락이 있고 그 안쪽에는 고마리 군락이 5~10m 폭의 띠 모양을 이루고 있다. 그 안쪽으로는 물고추나물-보풀군락-송이고랭군락-마름군락으로 경계가 구분되어 나타난다.
때론 그 사이를 흰뺨검둥오리가 사이좋게 짝지어 먹이활동을 하고 있기도 하고, 다양한 새들이 주변 숲과 습지를 넘나든다.
물영아리 습지 주변 윤노리나무 잎에 앉은 청개구리.
때죽나무 꽃이 지기 시작하고 그 뒤를 이어 새비나무 사람주나무 꽃이 피고 있다.
초여름 습지에는 개구리 소리, 풀벌레 소리, 섬휘파람새를 비롯한 온갖 새 소리가 가득 울려 퍼진다. 마침 윤노리나무 잎에 나뭇잎과 똑같은 색의 청개구리가 앉아 쉬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물영아리 습지를 찾을 때면 늘 다양한 동식물을 만나는 즐거움이 있다. 물을 중심으로 모든 생태계는 연결되어 있다. 물이 있는 곳엔 항상 다양한 새들이 날아든다. 온갖 나무열매를 먹은 새들이 똥을 싸면 자연스럽게 다양한 나무가 자라는 숲을 이룬다.
그래서일까, 산정호수를 품은 분화구 안쪽은 박쥐나무, 참꽃나무, 생달나무, 산딸나무, 서어나무, 산뽕나무, 때죽나무, 참식나무, 새덕이, 사람주나무 등 다양한 활엽수가 울창하다.
비 온뒤 물이 고인 물영아리 습지.
건기에 바닥이 드러난 모습. 한여름 풀이 가득 뒤덮이면 습지가 초원처럼 보이기도 한다.
비가 많이 오는 시기에 물영아리 습지는 호수처럼 물이 고였다가 비가 오지 않는 건기에는 습지로 변한다. 물영아리 습지는 호수가 육지화 되어가는 중간 과정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늪 형태의 습지이다.
습지에는 제주도에서만 볼 수 있는 영아리난초를 비롯해, 멸종위기종 2급 물장군과 맹꽁이, 긴꼬리딱새, 팔색조 등210여 종의 습지식물과 47종의 곤충, 8종의 양서류와 파충류 등 다양한 생태계를 이루고 있다.
물영아리 습지에서 먹이활동을 하는 흰뺨검둥오리.
물영아리는 분화구는 화산지형의 특성상 물이 잘 빠지는 송이(스코리아)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런 지질에 순전히 빗물만으로 습지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은 습지의 토양이 이탄층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탄층은 물이 고인 상태에서 부패와 분해가 완전히 되지 않은 식물의 유해가 진흙과 함께 오랜 시간에 걸쳐 퇴적한 지층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퇴적 당시부터 현재까지 수천 년간의 시대별 생태환경을 유추할 수 있어 학술적으로도 가치가 매우 높다. 이탄습지는 주로 냉대림에서 많이 발견되기에 우리나라 남부 지역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희귀한 습지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가장 따뜻한 제주의 남쪽에 위치한 곳에 이탄습지가 존재하는 것은 참 신비한 일이다.
물영아리 오름 습지센터가 있는 물영아리 오름 주변에는 생태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다양한 습지 교육과 람사르습지 문화제 같은 행사가 열린다.
물영아리는 아름답고 독특한 풍경만큼이나 화구호라는 지형과 지질적 특이성, 온대 산지 습지의 독특한 생태계를 잘 간직하고 있어서 2000년 12월 11일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되었다. 2007년에는 우리나라에서는 다섯 번째로, 제주도에서는 첫 번째로 람사르습지로 지정되었다. 서귀포시는 물영아리가 람사르습지로 지정된 이후 매년 물영아리에서 람사르 습지문화제를 열고 주민주도형 습지 보전활동과 생태교육. 생태관광을 활성화해왔다.
이런 활동들을 인정받아 2022년 11월 물영아리가 속한 서귀포시가 람사르습지도시로 선정되었다. 이로써 제주도는 1918년 제주시가 람사르습지도시로 선정된 데에 이어 서귀포시까지 람사르습지도시로 선정되었다. 제주도는 물영아리, 동백동산습지, 1100고지, 물장오리, 숨은물뱅듸 다섯개의 오름이 람사르습지로 지정되어 마을마다 습지보전 활동과 교육, 생태관광 등 다양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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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디어 제주, 기획특집연재, 물왓이야기1, 2019.03.15 ( http://www.mediajeju.com/news(articleView.html?idxno=315139)
2) 수망리에서 처음 사람이 살기 시작한 때의 일이다. 한 젊은이가 소를 들에 방목했는데 그만 소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젊은이는 잃어버린 소를 찾아 수망리 일대는 물론 주변의 오름들도 샅샅이 뒤졌지만, 소는 없었고 결국 마을에서 한참 떨어진 오름의 정상까지 가게 되었다. 젊은이는 배고픔과 목마름에 기진맥진하여 더는 움직일 수 없었고 앉은 자리에 쓰러졌다. 비몽사몽하고 있을 때 백발노인이 나타나 "여보게 젊은이, 소를 잃어버렸다고 상심하지 말게. 내가 그 소 값으로 이 오름 꼭대기에 큰 못을 만들어 놓겠네. 그러면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소들이 목마르지 않게 될 것이고 다시는 소를 잃어버리고 찾아 헤매는 일도 덜어질 것이네. 부디 잃어버린 소는 잊어버리고 다시 한 마리를 구하여 부지런히 가꾸면 분명 살림이 늘어 궁색하지 않을 것이네."라고 하는 것이었다. 눈을 떠보니 아무도 없고 해는 저물어 가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맑던 하늘에 먹구름이 덮이면서 어두워지더니 비가 폭포처럼 쏟아졌다. 눈앞에는 큰 못이 출렁거리고 못 가에는 소 한 마리가 풀을 뜯고 있었다. (출처 : 물영아리 생태공원 안내 표지판 '물영아리 오름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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