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름 사이에 숨은 드넓은 이탄습지, 숨은물뱅듸

숨은물뱅듸.(2023. 4. 10)
제주시 애월읍 광령리에 속한다. 


글/ 사진:  습지서포터즈 양정인


한라산 1100고지 휴게소에서 출발해 숨은물뱅듸를 향해 가는 길엔 
조릿대 군락과 개서어나무 군락이 있다.


4월 초순, 한라산 아랫동네에는 온갖 봄꽃이 피어나고 있지만 해발 980미터에 있는 숨은물뱅듸는 이제야 막 봄맞이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한라산 1100고지에서 40여 분 정도 무성한 조릿대 숲을 헤쳐 내려가다보면, 갑자기 시야가 탁 트이며 드넓은 습지가 모습을 드러낸다고요한 초원에 노루 울음소리만 들려오는 숨은물뱅듸의 고즈넉한 풍경은 참으로 독특했다.

숨은물뱅듸에는 멸종위기야생생물 II급인
자주땅귀개, 매
긴꼬리딱새애기뿔소똥구리 등 중요 생물종이 자라고 있다.


얼핏 보기엔 평범한 초지 같지만 장화를 신고 걸어야 할 정도로 물을 잔뜩 머금은 평평한 땅이 고산지대에 넓게 펼쳐져있다. 스펀지처럼 물컹한 땅을 밟을 때마다 발자국에 물이 쑥 올라온다. 이런 땅이 무려 1.175, 35만 평이나 펼쳐져 있다니 볼수록 신기한 곳이다.

뱅듸는 제주어로 풀이 우거진 거칠고 평평한 들판을 말한다. ‘숨은 물은 삼형제오름, 살핀오름, 노로오름, 붉은오름이 사방을 감싸고 있어 오름들 사이에 숨은 물이라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봄이 되면 습지 가운데부터 시작해
송이고랭이, 올챙이고랭이, 골풀, 기장대풀이 순서로 군락을 이루어 자란다.

숨은물뱅듸는 희소한 생태계가 잘 보전되어 있고 희귀종 동식물의 서식처로 보전가치가 인정되어, 2015년 람사르습지로 등재되고 습지보호지역으로도 지정되었다. 습지보호를 위해 2026년까지는 학술조사 활동 등을 제외한 일반인의 출입을 제한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탐방로나 정자, 데크 같은 구조물이 없는 야생 습지 모습 그대로를 볼 수 있어 더욱 귀하게 느껴진다.


숨은물뱅듸에 많이 보이는 나무 섬. 
나무 섬마다 꽝꽝나무가 터를 잡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숨은물뱅듸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시선을 끄는 건 습지 곳곳에 작은 섬처럼 들어선 나무 군락들이다. 솔비나무나 아그배나무 같은 나무들이 서 있고 그 아래에는 키 작은 꽝꽝나무가 덤불을 이룬 모습이 곳곳에 보인다. 마치 사람이 일부러 정원을 가꾼 듯이 비슷비슷한 모습에 궁금증이 생긴다.

 

나무섬은 습지가 육지화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 모습은 나무섬(tree isiand) 현상으로, 습지가 일반적인 땅처럼 지질과 식생이 변화해 육화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꽝꽝나무, 솔비나무, 아그배나무 같은 물을 좋아하는 선구식물이 먼저 습지에 자리를 잡으면 그곳에 초본류들이 뿌리를 내린다. 단단해진 그 섬에 덩굴식물이 자라고 양치식물도 더불어 살아간다. 마치 자연전시장처럼 습지가 육화되어 숲으로 변화해 가는 모습을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

숨은물뱅듸는 곳곳에 작은 연못처럼 항상 물이 고여있는 곳이 있는가 하면, 비가 왔을 때 일시적으로 물이 고였다가 빨리 빠지는 곳이 있고, 육화가 진행되어 숲을 이루고 있는 곳으로 이루어졌다.


탐방 며칠 전 내린 비로 물을 흠뻑 머금고 있는 숨은물뱅듸.

 숨은물뱅듸의 토질은 검은 흙 이탄층(泥炭層)으로 이루어져 있어 제주 사람들은 검뱅듸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탄층은 습도가 높고 기온이 낮은 곳에서 죽은 식물이 부패와 분해가 완전히 되지 않은 상태로 진흙과 함께 퇴적한 지층이다

숨은물뱅듸와 같은 고산지대는 겨울이 길고 봄이 늦게 오기에 낮은 온도에서 습지 식물의 유해가 천천히 썩으면서 그 위에 다시 식물의 사체가 쌓이는 게 반복되면서 두텁고 풍부한 이탄층을 형성하게 된다. 숨은물뱅듸를 걸을 때 특유의 물컹하고 폭신폭신한 느낌은 이런 이탄층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이탄층만의 특이한 환경은 생태적으로도 가치가 높다. 우리나라에 있는 산지 습지 대부분은 저층습원으로 영양이 풍부한 토양에서 갈대, 부들, 창포, 버드나무, 오리나무 등이 주로 자란다. 반면에 고층습원은 습도가 높은 냉대의 저지대나 온대의 고산대에 있으며, 주요 수원을 강우나 안개에 의존하고 물이끼와 이탄토양층이 발달하는 것이 특징인 습지다.


움트는 습지 식물 사이로 고층습원의 특징인 물이끼가 보인다.

우리나라에서는 인제 대암산 용늪만(해발 1380m)이 고층습원의 특징을 지닌 것으로 평가되었다. 그러다 2018년 국립환경과학원의 정밀조사 결과, 제주의 숨은물뱅듸에서도 고층습원의 특징을 대표하는 물이끼 군락이 확인됨에 따라 남부지방 최초의 고층습원지로 인정받았다.

고층습원의 토양은 약산성에 영양이 풍부하지 않기에 그런 환경에 적응해 자라는 희귀한 식물들이 자란다. 숨은물뱅듸에는 자라는 멸종위기 2급 식물인 자주땅귀개도 토양에서 얻지 못한 부족한 영양을 보충하기 위해 뿌리 부분에 벌레잡이 주머니가 있는 식충식물이다.

2022년에는 숨은물뱅듸에서 신종 물이끼류가 발견되었다. 학계에서는 이를 '검뱅듸물이끼(가칭)'로 국제학계에 보고할 계획이라고 한다. 물이끼류는 이산화탄소 저장능력이 탁월하다고 알려지면서 전세계적으로 그 중요성에 주목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연구가 충분히 이뤄지지 않은 상태다. 습지가 기후변화 해결의 열쇠로 주목받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숨은물뱅듸 습지 역시 아직 우리가 알지 못하는 많은 비밀을 품고 있는 곳 같다. 


숨은물뱅듸 습지 너머로 주변을 에워싼 삼형제큰오름과 삼형제샛오름 능선이 보인다.

숨은물뱅듸는 물이 잘 빠지는 화산암인 조면현무암이 분포하는 지역으로, 습지가 만들어지기 어려운 지형임에도 습지가 만들어진 특수한 경우이다. 숨은물뱅듸는 점토의 구성비가 90% 이상 되는 퇴적층이 형성되어 있어 빗물이 빠지는 것을 막아주고, 주변 오름에서 흘러내린 물이 고여 웅덩이를 이루고 있다.

물이 귀한 제주의 중산간 마을에서는 습지가 있는 곳이면 주변에 숯을 굽는 숯막이 있고 가축을 길러 물을 먹이는 용도로 사용했다. 숨은물뱅듸 역시 근처에 숯을 굽던 터가 남아있다. 이제는 보호지역이 되어 출입을 통제하고 있지만 예전에 놓아기르던 소들이 야생화 되어 아직도 숨은물뱅듸 습지를 찾는다고 한다. 습지 주변엔 소똥이 많이 보였고 멧돼지로 추정되는 야생돌물이 흙을 파헤친 흔적도 곳곳에 보였다. 사람이나 동식물 할 것 없이 물을 공급해 주는 습지는 매우 소중한 장소다

 

숨은물뱅듸에 많이 보이는 솔이끼.
겨울에도 습지를 푸르게 물들이는 이끼류들이다.  


올챙이고랭이 새순 사이로 콩제비꽃 새순도 고개를 내밀고 있다.

도롱뇽 알도 보인다.

선피막이풀 새순이 돋고 있다.

아직은 습지 식물들이 새순을 빼꼼 내놓고 있었던 숨은물뱅듸. 우리가 방문하기 전날까지만 해도 습지에는 살얼음이 끼었다고 한다. 그래도 습지에서 개구리알과 도롱뇽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더디지만 한발짝 한발짝 봄이 오는 중이다. 

봄이 느리게 오는 곳. 그래서 숨은물뱅듸는 희귀한 고산 이탄습지의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기도 하다이곳에 사는 다양한 식물들이 자라난 모습을 보지 못해 아쉽지만 봄, 여름, 가을 습지 곳곳 아그배나무 섬개벚나무 꽃이 만발할 것이고, 자주땅귀개, 한라돌쩌귀, 세바람꽃, 덩굴용담, 애기어리연, 바늘엉겅퀴, 산꽃고사리삼, 눈범꼬리, 제주피막이, 참꽃나무, 반디미나리, 벌깨냉이 등이 철따라 피고 지겠지 상상해본다.  


이번(2023.4.10) 탐방은 제주시 조천읍 람사르습지도시 인증프로그램지원사업에 속한 습지환경동아리의 습지탐방으로 영산강유역환경청의 허가를 받고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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