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 초원의 오아시스 노루샘 습지
고산 초원의 오아시스 노루샘 습지
2024. 09. 11
글/사진_습지블로그 서포터즈 양정인
노루샘은 선작지왓 인근 해발 1680미터에 있으며
윗세오름 대피소 가는 길목에 있다.
한라산에 다녀오면 늘 벅찬 선물을 한아름 받고 온 느낌이다. 여름마다 한라산을 찾으면 절로 기도하게 된다. 기후변화로 온난화를 지나 열대화로 접어들고 있지만 한라산만은 부디 지켜지기를. 불과 몇 백 미터 아래 도시는 한증막 같은 더위 속인데 한라산에는 서늘한 가을 바람이 분다. 올여름 폭염에 시달린 사람에게 이 바람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영실 계곡 가파른 능선을 오르며 땀에 젖은 뒤 마시는 노루샘 물 맛은 어떤 명품 생수와도 비교되지 않는 감로수이다.
기암절벽이 펼쳐지는 영실 계곡을 올라 만나게 되는 선작지왓의 광활한 평원에는 거대한 가마솥 같은 백록담 화구벽과 윗세(붉은)오름, 윗세누운오름, 윗세족은오름 능선이 나란히 펼쳐진다. 이 웅장한 벌판에 진분홍 털진달래와 철쭉이 흐드러지면 그 앞에서 사람의 말과 생각은 초라해진다.
노루샘은 해발 1600미터 선작지왓을 지나 해발 윗세오름 대피소 가는 길목에 만날 수 있다. 윗세누운오름 자락에서 흘러내린 물이 노루샘으로 힘차게 흘러넘치고 고산습지가 펼쳐진다. 노루샘은 가뭄으로 백록담 물이 말라도 꾸준히 흘러나온다고 하니 고산 초원의 오아시스라 할만하다.
노루샘은 윗세누운오름 자락에서 자연 용출된
천연 샘물로 주변에 습지를 이루고 있다.
올여름 제주에는 가뭄이 심했지만 노루샘은 시원하게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한라산 노루가 와서 마신다고 노루샘이라 부르지만 노루샘 주변 습지는 다른 야생 동물에게도 중요한 물 공급원이다. 제주 특산종인 제주도롱뇽과 해발 1700미터 고지까지 분포하는 줄장지뱀도 이 곳 습지를 찾는다.
노루샘 주변의 습지는 고산 지대 야생동물들이
물을 얻을 수 있는 귀한 장소다.
봄에 찾았을 때는 습지 주변에 고원지대에서 볼 수 있는 흰그늘용담, 설앵초, 바위미나리아재비, 제주양지꽃, 좀민들레 등이 흐드러져 있었다.
한여름이 되니 노루샘 주변 고산습지에는 머위 꽃과 바늘엉겅퀴 꽃이 흐드러지고 고원 지대에 사는 나비들은 이 꽃 저 꽃 밀원을 찾아 날아다닌다. 습지 주변의 시로미도 이제 까만 열매를 맺었다.
노루샘 습지의 봄.
바위미나리아재비와 도시처녀나비 (5월)
바위미나리아재비는 해발 1000미터 이상 고지대 구름이 맞닿는 곳에 핀다고 해서 구름미나리아재비라고도 부른다. 백두산, 한라산이 주요 서식지다. 번들거리는 노란 꽃에 왁스 성분이 있어 고산지대 강한 자외선으로부터 보호한다.
도시처녀나비는 한라산 1100미터 이상에서 서식하는 북방계나비로 최근 온난화와 초지 감소로 개체수가 많이 줄어들고 있다.
노루샘 습지의 봄. 제주양지꽃(5월)
제주양지꽃은 4~6월에 한라산 해발 700미터 이상 고산지대에 자라는 제주 특산식물이다.
자주빛 붉은 줄기가 옆으로 기면서 자라는 점이 특징이다.
노루샘 습지의 봄. 좀민들레 (5월)
좀민들레는 한라산 해발 1500미터 고지, 습기 있으면서 햇빛이 잘 드는 곳에 자란다.
보통 민들레보다 개체 크기나 키가 작으며 5~6월에 꽃을 피운다.
한라산에 자라는 제주 특산식물이다.
노루샘 습지의 봄. 설앵초 (5월)
설앵초는 해발 800미터 이상의 고산지대의 습기 있는 초원이나 바위 근처에서 자란다.
5~6월에 꽃을 피운다.
노루샘 습지의 봄. 흰그늘용담 (5월)
흰그늘용담은 1500미터 이상 고산 초원에 자라는 한라산 특산식물이다.
습지 근처 양지바른 풀밭에서 볼 수 있다. 5~6월에 꽃을 피운다.
노루샘 습지의 여름. 바늘엉겅퀴 (8월)
바늘엉겅퀴는 한국 특산종이자 제주도 고유종이다. 한라산 고지대 풀밭에 자라며 8~9월에 꽃을 피운다.
노루샘 습지의 여름. 호장근 (8월)
봄에 털진달래가 물들었던 선작지왓에는 여름이 되면 호장근이 만발해진다.
냇가나 산지에 자라는 호장근은 노루샘 습지 주변에도 꽃을 피운다.
노루샘 습지의 여름. 열매를 맺은 시로미 (8월)
시로미는 고산지대의 건조한 바위틈에서 자라지만 공기 중 습도가 높아야 잘 자라기에 노루샘 습지 주변 바위에도 많이 자라고 있다. 한라산 특산 식물인 시로미는 구상나무와 돌매화나무와 더불어 빙하기에 한라산까지 올라왔다가 간빙기에 온도가 오르면서 한라산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갇혀버린 식물이다.
한라산은 이들 북방계 고산식물의 세계적인 남방한계선이기도 하다. 시로미를 비롯한 한라산의 빙하기 식물들은 최근 기후변화로 인해 한라산에서도 점점 개체수와 서식지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노루샘 습지의 여름. 곰취 (8월)
산지의 습한 곳을 좋아하는 곰취도 노루샘 습지에 군락을 이루고 있다. 한라산을 오를 때면 늘 시공간이 뒤섞여 신화의 시공간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이다. 아랫동네에선 이미 다 진 꽃이 한라산에는 아직까지 피고 있기도 하고, 가을에 피는 꽃이 서늘한 고원지대에선 벌써 흐드러져 있기도 하다.
어리목 탐방로 사제비 동산에 있는 사제비샘
한라산 정상에서 땅 밑을 흘러 중턱에서 샘솟는 천연 약수는 노루샘을 비롯해 영실샘, 사제비샘 등이 있다. 이들 모두 저절로 솟는 샘물이다. 이 샘물들은 모두 먹는 물 공동 시설로 관리하고 있다. 매년 분기별로 수질 검사를 해 응용해 적합한지 확인하는데, 매회 대부분 검사에서 마시기에 적합한 것으로 나타난다.
노루샘은 한라산 선작지왓 인근 해발 1680미터에 있으며 영실 탐방로를 걷다가 만날 수 있다. 영실샘은 서귀포시 하원동 영실휴게소 입구에 있어 탐방객을 반긴다. 사제비샘은 어리목 탐방로 해발 1천1420m에서 샘솟아 등산객들의 목을 축여준다. 과거에는 어승생악물, 사라샘, 방아오름샘, 오름샘, 백록샘 등도 식수로 음용했지만 지금은 사용하지 않고 있다.
한라산 탐방로의 자연 용출 샘물
한라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기 전 제주는 해발 1400~1800m 고지대에서 소와 말을 방목했었다. 이런 사례는 국내에서도 찾아보기 힘들어 제주지역 특유의 '상산방목' 목축문화로 평가 받고 있다. 한라산 고지대 방목의 장점은 싱싱한 풀을 먹일 수 있을 뿐 아니라 여름에도 18도 안팎의 선선한 날씨 덕에 테우리들이 소와 말에 달라붙는 진드기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고산지대 방목이 가능하려면 무엇보다도 물이 필수였다. 해발 1400~1700m에 있는 노루샘, 사제비샘, 백록샘, 방아샘 등은 테우리들 뿐만 아니라 소와 말에게 물을 공급해줬다. 간혹 소들은 백록담까지 내려가 물을 마시기도 했는데 그때 야생화 된 소들의 후손이 아직도 한라산에서 먹이 활동을 하는 흔적이 보인다고 한다.
비가 많이 온 뒤 한라산을 탐방하다 보면 곳곳에 물이 샘솟고 습지가 조성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한라산 자체가 물을 가득 머금은 거대한 물 그릇 같다는 느낌이 든다. 한라산 곳곳에 자연 용출되는 샘물과 습지가 있을 수 있는 것은 화산 지질의 특징 때문이다. 지표면의 빗물이 잘 빠지기도 하지만 땅 밑에서는 지하수가 함양 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빗물이 대수층(다공성의 암석 또는 기타 물질로 이루어져 물이 스며들기 좋은 지층)을 따라 흐르다가 암석이나 지층의 틈을 따라 지표면으로 솟아나는 용천수가 한라산부터 시작해 제주 섬 곳곳에 발달한 까닭이기도 하다.
과거 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한라산은 어머니와 같은 산이었고 신령한 산이었다. 거기서 솟는 샘물은 젖줄이자 신령한 물이었다. 물이 귀한 섬인 만큼 용천수는 살아있는 물이라 하여 '산물'로 귀하게 여겼다.
지금 한라산은 세계자연유산이자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으로 지정되었고 전 세계 사람들이 찾는 명승지가 되었다. 그들이 플라스틱 병에 담긴 제주의 물이 아닌 이 땅에 살던 사람들의 삶과 마음이 담긴 땅에서 솟는 '산물'의 소중함을 느끼고 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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