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산리 습지 - 가장 큰 못 수산한못, 전주물꼬리풀의 자생지 한못서못(통한못)
수산리 습지 가장 큰 못_ 수산한못 전주물꼬풀의 자생지 _ 한못서못(통한못) 2024. 08. 30 글_습지블로그 서포터즈 오은주 사진 _성산읍습지조사팀 수산마을은 연못이나 습지를 통해서도 전형적인 중산간 마을의 특징을 보여준다. 마을 곳곳에 연못이 있었고, 습지도 많은 곳에 산재해 있었다. 기록되어 있는 연못과 습지는 용천수 포함 28개가 있었다. 지금은 성앞못, 동치못, 누루못, 진빌레못, 진안물, 양백이물, 통개나물, 공쟁이못, 맥다리물 등은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수산마을의 설촌 유래 를 살펴보면, 수산리는 首山, 水山 2가지로 쓰였다. 원래 [首山] 이었는데 마을이 커지면서 양촌(良村)으로서의 입지가 굳어지게 되자 [首]는 우두머리, 처음, 먼저, 머리 등의 의미가 있는 반면 꾸벅거리다, 魁首自白(괴수자백) 등의 의미도 갖고 있기 때문에 양반, 선비가 사는 마을 이름으로서는 적당하지 않다고 하여, 仁者樂山 知者樂水의 글자를 따서 [水山]으로 개명하였다(수산리지)고 한다. 17세기부터 수산리와 흘전촌으로 구분되었는데, 수산리[지금의 수산1리]의 옛 이름은 물미로, 믈미, 믈메[지금 대수산봉]라는 오름 북서쪽에 형성된 마을이라는 데서 생긴 이름이다. 1914년 종전의 성읍리의 일부를 병합하였다. 흘전촌[지금의 수산2리]의 옛 이름은 홀입, 홀앞, 곶앏, 곶앞, 화전(化前)촌으로, '덤불 숲의 앞'이라는 뜻이다. 현재의 실제 발음은 고잡(고잪)이다. 고려시대 수산평 일대에 말과 양 등을 방목하다는 기록에 비추어 본격적으로 사람이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은 13세기 말~14세기 초로 추정한다. 수산1리는 600여년 전, 수산2리는 800여년 전에 설촌한 후 마을이 커졌다고 한다.(성산읍역사문화지 290쪽) 수산리지에서는 1,000년 전에 설촌되었다고 기술하였다. 수산리는 태종16년(1416) 정의현이 설치될 때 정의현에 속해 있던 지역으로, 고종17년(1880) 정의현 좌면 수산리가 되었다. 1915년 5월 1일 도제(島制)가 시행되면서